눈이 보고 싶은 거다. 백설기 같이 하얀 눈. 그러고는 발자국을 하나씩 새기고 내가 돌아왔던 풍경을 돌아봤을 때, 내가 만든 길옆에는 더 많은 발자국이 보였으면 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지금은 여름이었으므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던지, 구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만년설을 보던지.
공항과 기차역을 좋아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여행은 더 좋아하기 때문에 결정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히말라야를 등반하기 위해선 꽤나 많은 준비를 필요로 했다. 정부의 승인과 지역승인을 거쳐야만 하고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깊은 숲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가이드도 고용해야 했다. 더욱이 옷과 신발도 문제였다. 더운 나라만 방문할 계획이었으니, 가방 속 에는 여름철 옷들과 가벼운 샌들 밖에 없었다.
등산객들이 많이 오가는 마을이라 다행히도 옷과 신발은 마을 근처에서 싼 값에 살 수 있었으나 퍼밋이 문제였다. 80불의 비용과 가이드 비용은 그것보다 두 배가 든다고 하니 여행 예산을 훌쩍 넘었다. 일단 그냥 걷자. 따뜻한 옷과 며칠을 걸어도 끄떡없는 신발과 책과 시간이 있으니 그렇게 무서울 건 없었다. (결국 검열에 걸려 돈을 다 냈다)
태양은 떠 있었으나 숲 속은 그림자로 드리워 있어 새벽같이 어두웠고, 좁고 가파른 길은 거머리가 들러붙기 아주 좋은 장소였다. 안나푸르나 산, 두 개의 봉우리를 지나고나니 돌로 쌓은 벽체와 양철지붕으로 지어진 작은 집이 보였다. 아주 작은 굴뚝으로 연기가 나오는 걸 봐선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했다. 사람이란 존재가 이렇게나 반가웠던 것은 단순히 내가 지도를 따라서 잘 오고 있다는 안도감 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작은 부엌과 방 하나가 같이 달려있던 집 앞에는 꽤나 큰 식탁과 여행객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난 아주 무의식적으로 그들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들이 아주 닮은 탓에 남매거나 신혼즈음 될 거라 으레짐작을 했다.
‘68일째에요, 우리가 만난 일이. 그리고 68일째 히말라야를 걷고 있습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란다. 네팔에 도착한 첫 날 그들은 처음 만났고, 걷다보니 벌써 두 달이 넘었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히말라야를 다 걸어보자며 시작한 여정이라고 한다. 그들은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밥을 절반정도 먹고 맥주를 다 마시고 또 절반을 먹었다. 그들이 만든 공간 속 시간은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아주 천천히 흘렀으며, 모든 히말라야의 풍경에서 서로를 적셨다.
나는 잠깐 그들의 공간 속에서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웃자, 그들도 웃었다.
결국 나는 만년설을 봤다. 하얀 눈을 보고자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와 돌과 물과 바람이 생각났다. 내가 있는 이 장소와 이 시간위에 있을 날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 나는 지금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되는 비밀을 공유하려 한다.